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

초기 영국의 종교개혁은 종교개혁자가 아니라 국왕에 의해 진행되었다. 피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메리 여왕은 개신교도를 극심히 박해했다. 그 후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하면서 개신교를 받아들였지만, 영국은 구교와 신교가 혼합된 중도 노선의 성공회(Anglican)를 국교로 정하였다.

이러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신앙의 중도 노선에 반발하여 일어난 사건이 청교도 운동이었다.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의 구교적 요소를 타파하고 개혁 신조를 세우려고 하였다. 이런 때에 스코틀란드의 왕인 제임스 I세가 영국의 왕이 되었다. 그는 청교도들을 박해하고 영국 교회를 감독 체제로 유지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영국의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 먼저 화란의 Leiden이란 도시에 정착했다.

청교도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Leiden 대학에서 보냈는데 그 대학의 교수가 알미니안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인 알미니아누스였다. 알미니안주의는 청교도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신앙이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다시 1620년 미국의 뉴 헤이븐으로 떠났고 이들이 바로 미국 청교도들의 조상이다.

그 후 정세가 바뀌어 1640년 영국에서 국회의 다수파가 된 장로교인들이 개혁주의 총회를 개최하려고 했으나 영국 왕 찰스 1세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나 그들은 1643-1648년 동안 1163회의 모임을 통하여 이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 5년 6개월 22일 동안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회장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이때 모인 나라는 영국, 스코틀랜드, 화란이다. 이 3개국이 연합하여 125명의 목사와 22명의 하원의원과 10명의 귀족 등 157명이 5년 6개월 22일간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 8시간씩 1,163회 모임 끝에 만들어진 것이며, 매 출석인원은 60~80명이었다. 특히 한 달에 하루씩 금식기도하며 표준문서를 작성하였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대역사였다.

이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는 먼저 1649년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이를 승인하였고 그 후 1690년 영국의 윌리암과 메리 왕 때 영국 황실의 비준을 얻게 됨으로서 비로서 영국 교회의 신앙고백의 표준으로 그 지위를 차지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그 바탕이 칼빈주의 신학이며 청교도를 통해 미국 대륙에 들어가서 1729년 미국 장로교회 신조로 받아들였고, 미국 장로교회의 선교를 받은 한국장로교회도 1910년 초기 이것을 채택하고 한국장로교회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 또 이 문서는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3장 2) 대요리문답 196문 3) 소요리문답 107문 세 가지로 모든 장로교회의 정치 및 예배 모범을 총 집대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