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주일

성경구절 창 17; 행 2:39; 갈 3:23-29; 골 2:11-12




72. [질문] 외적으로 물로 씻는 것이 죄를 씻는 것입니까?
    [대답]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정결하게 해주십니다.

73. [질문] 그렇다면 왜 성령의 세례를 "중생의 씻음" 그리고 "죄를 정결케 하는 것" 이라고 합니까?
    [대답] 몸의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으로 되는 것을 물로 씻음으로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외적으로 물로 씻음을 받는 것이 영적으로 우리의 죄악이 참으로 정결케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표를 통하여 우리에게 확신을 줍니다.

74. [질문] 유아들이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유아들도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주가 되신 성령과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죄로부터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어른들과 동일합니다. 그들도 언약의 표시가 되는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목되어져야 하며 구약 시대의 할례와 같이 신약시대에는 세례로서 불신자의 어린이들로 부터 구분되어져야 합니다.

    앞에서 이번 과의 문제들을 언급했었다. 이 과에서는 좀 더 많은 부분들을 첨가하여 강조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중요한 것은 성례 그 자체에는 구원의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우리는 세례를 통한 중생의 교리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위험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살펴보자. 나는 유명한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로 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 사람의 말은 세례 속에 특별한 힘이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가? 항상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세례는 성도들의 죄를 정결케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는 사실이다. 세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들어가게 하는 가시적인 방법으로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이 우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았다고(딛 3:5) 하는가? 이것이 이 부분에서 해설하고자 하는 요리문답의  두 번째의 커다란 진리이다. 세례가 중생의 씻음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구원의 실체와 그 실체를 나타내는 상징 사이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세례를 단지 외적인 상징의 관점에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례는 성령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사역을 성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그림이다.
    표(sign, 세례)와 그 표가 의미하는 것(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사이의 구분되어짐을 잊어버리는 일은 아주 위험하다. 그리고 또 하나 위험은 하나님께서 함께 결합시켜 놓은 것을 분리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오늘날 성도들이 그들의 개종을 성경적인 근거를 지닌 세례보다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과 연관시키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부흥회의 구원으로 초정하는 것과 같은 것). 우리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그리고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6:3)
    예를 들면 이슬람교가 득세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이 있다. 만약 그가 세례를 받고자하면 그의 생명이 위험하고 그와 함께 세례를 받는 그의 자녀들도 위험한 상태에 있게 된다. 그러나 그가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 앞에서 주님을 고백해야한다. 그는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다. 그가 실체(중생함)와 상징(물세례) 사이를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당신이 그에게 "언제 죄 씻음을 받았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의심 없이 "나와 나의 자녀들이 거룩한 세례를 받을 때"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그의 말이 옳다. 세례는 "외적으로 물로서 씻는 것과 같이 하나님에서 우리의 죄를 영적으로 정결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표와 그 표가 의미하는 실체 사이를 구별할 때에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완전히 구별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만약 그들의 부모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라면 왜 유아세례를 행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 이것이 이 요리문답에서 강해하는 세 번째 진리이다. 하나님의 이 명령은 창세기 17장에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표(그 당시는 할례)를 그와 그의 남자후손들에게 행하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예식을 후손 대대로 행하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아니하셨다. 반대로 그것을 확증하셨다(갈 3:15).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언약을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어놓았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라고 말한 이유이다. 차이는 단지 구약의 할례가 신약에서 세례로 대치된 것이며(골 2:11-12), 지금은 남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이다(행 8:12).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같이 신자의 자녀들과 불신자의 자녀들이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것과 같이 본질상에는 차이가 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은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이다. 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을 택하셨다(행 2:39). 성도의 자녀와 불신자의 자녀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차이 때문에 우리의 자녀들은 마땅히 주님의 교회 안에서 양육되어져야 한다. 인생의 첫 출발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규례 속에서 자라간다. 그들은 말씀과 성례 아래 놓여 있다.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에서 그들은 구원의 길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자녀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것은 우리의 자녀들이 모두 택함을 받았고 중생함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 반대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추측 속에서 살기를 원치 않으시고 그의 약속 안에서 언약의 진실함과 소망 가운데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믿음의 후손들을 통하여 그의 교회들을 보존하실 것이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다"(행 2:39). 오늘날의 교회를 잘 분별하여 살펴보라. 그러면 매우 분명한 사실이 보일 것이다. 교회의 성실한 성도들의 대부분은 언약의 자녀들 안에서 양육된 자들이다. 옳다. 유아세례는 약속의 모든 자손들에게 베풀어야한다. 만약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아세례는 아브라함시대의 유아할례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구원하시는 참된 표(sign)가 된다.

[질문]

1. 때때로 신교에서 성례가 구원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가?
2. 만약 세례가 구원의 힘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디도서 3:5의 의미는 무엇인가?
3. 표와 그 표가 의미하는 것을 분리했을 때, 그것이 위험한 이유는 무엇인가?
4. 우리가 왜 성도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푸는가?
5. 언약의 자녀들이 중생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연구와 토의를 위한 문제들]

1. 세례와 세례가 의미하는 것을 구별한다면 무슨 위험한 문제가 생기는가?
2. 만약에 유아세례를 받기 이전에 죽는다면 그 어린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과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세례 받기 이전에 죽는 영아들에 관한 교리를 비교하라.
3. 만약 어린아이가 중생치 못했다면 무슨 권위를 가지고 우리가 유아세례를 베풀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부르는가?
4. 우리 자녀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녀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것이 그들의 구원에 관하여 잘못된 확신을 가져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