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A.D. 1563) 제 50주일

 

제 125 문 : 네번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말의 뜻은

       우리의 육신적 필요를 채우셔서1)

       하나님께서 모든 좋은 것의 유일한 근원이시라는 것과2)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우리의 노고와 걱정 그리고

       하늘의 은사조차도 어떠한 유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3).

       그리하여 어떠한 피조물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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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편 104:27-30; 145:15-16; 마태복음 6:25-34
2) 사도행전 14:17; 17:25; 야고보서 1:17
3) 신명기 8:3; 시편 37:16; 127:1-2; 고린도전서 15:58
4) 시편 55:22; 62:10; 146:3; 예레미야 17:5-8; 히브리서 13:5-6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간구는 사람의 생명이 일용할 양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기도이고, 또한 우리가 일용할 양식도 구하여서 얻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몸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 주시는 이유는 “오직 주님이 모든 좋은 것의 근원임을 깨닫게”"(125문)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시고 우리는 주님께 구하여서 받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를 너무 낮추어서 말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우리 식구가 세끼 밥을 먹고, 또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는 것 쯤은 내 힘으로 다 할 수가 있다’' 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의 사람 구실은 하고 산다는 자부심이 있는데, 교회에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고 가르치면 자기를 너무 낮추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교회라면 그 정도의 기본적 인 것을 놓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좀 더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을가르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중요한데서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생활의 문제’와 ‘생명의 문제’'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생활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여서 '생명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것으로 잘 먹어도 하나님께서 불러 가시면 그 순간에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고,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을 잘 먹고 건강식을 한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진노를보이시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생활의 문제’를 놓고 보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복주심으로 생활의 문제를 풀고 살 수 있습니다. 조금 더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이만큼이라도 사회적 안정을 주시니까 우리가 직장에서 일하여 집안 식구도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사회에 진노를 보이시고 사회가 불안정하면 혼자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은행에많은 돈을 저축한 사람이라도 국제적인 통화위기가 와서 은행이 제구실을 못하면 손을 쓸 수도 없습니다.

 

생명의 문제나 생활의 문제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주님의 복 주심이 없이는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풀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25문에서 고백하는 것 처럼, "주님의복 주심이 없이는 우리의 염려나 노력, 심지어 주님의 선물들 조차도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못함을 알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염려와 노력’을 이야기 한 다음에 '주님의 선물들’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선물들'은 무엇을 가리키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염려하고 노력하여서 얻은 것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서 부지런히 힘을 써서 얻은 물질을 주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힘으로 얻었으니까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직장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직장에서 수고한 것을 수고한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고 선물입니다(시128:2).

 

125문의 고백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물들 조차도 ‘주님의 복주심’이 없이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선물로 주셔서 은행에 얼마 간 저축할 수 있었더라도, 그것으로 자기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의 복주심이 없이는 그 선물들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주님의 복주심만을 구합니다.

 

물론 '일용 할 양식’을 구하라는 것이 신자 더러 일일 노동자로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월급을 주는 안정된 직장은 매일 만나를 구하는 정신과 어긋나니까 좋은 직장이 아니라고 하거나, 일일 노동자가 되는 것이 만나를 매일 구하는 정신에 더 부합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만나의 교훈을 잘못 적용하여서 저축을 하지 않고 그날 번 것은 그 날 다 사용해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여기에서 다루는 것은 봉급을 받는 형식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주님은 이 간구에서 마음의 문제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날마다 주님의 복주심을 기대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미래를 정당하게 대비 할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 마음에는 ‘나의 염려나 노력이나 주님께서 이미 선물로 주신 것들 조차도 오늘 주님의 복주심이 없이는 아무 유익이 없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 내가 살 수 있다’ 하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