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A.D. 1563) 제 32주일

제 32주일 인간의 감사
 제 86문 : 우리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왜 우리가 선을 행해야 합니까?

답 : 분명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1)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한 것 입니다2).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구원의 열매에 의해서 우리 믿음이 확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3), 우리의 경건한 행실에 의해서 이웃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4).

제 87문 :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으며 회개하지도 않으므로 그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답 :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정한 자, 우상숭배자, 간음하는 자, 도적질하는 자, 주정뱅이, 거짓말장이(비방하는 자), 강도 등과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지 못한다고 가르쳐 줍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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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서 6:13; 12:1,2; 베드로전서 2:5-10
2) 마태복음 5:16; 고린도전서 6:19,20
3) 마태복음 7:17,18; 갈라디아서 5:22-24; 베드로후서 1:10,11
4) 마태복음 5:14-16; 로마서 14:7-19; 베드로전서 2:12; 3:1,2
5) 고린도전서 6:9,10; 갈라디아서 5:19-21; 에베소서 5:1-20; 요한복음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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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요리문답에서 두 주일 동안 구원과 선행에 대해 다루는 이유는, 이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주제를 다룰 때에 요리문답에서는 앞서 설명한 ‘반법주의’나 ‘신율법주의’ 같은 어려운 말을 사용하지 않고, 성경의 용어인 ‘열매’라는 말로 구원과 선행의 관계를 쉽게 요약합니다. 86문의 답 가운데 두 번째 문장에 나오는 “우리 각 사람이 그 열매로써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얻고” 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요리문답은 우리의 선행이 ‘열매’라고 가르쳐 줍니다. 선행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구원을 얻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맺는 ‘열매’입니다. 우리의 선행이 구원의 근거가 되면 ‘뿌리’라는 말이 맞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주님의 힘으로 선을 행하게 되기 때문에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사(比辭)로 그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요 15장). 사람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연합되어 있으면 열매를 맺지만, 그리스도께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 열매를 맺고서, ‘내가 스스로 이렇게 탐스러운 열매를 맺었다’ 하고 자랑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맺은 것인데, ‘내가 스스로 열매를 맺었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하여 달라고 하면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독립’한 가지는 곧 말라서 비틀어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 것도 그리스도께 붙어 있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서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서 거룩한 교제 가운데 사는 사람이 착한 일을 할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어떤 일을 하면,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열매는 맺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여서 선행을 하는 것은 참된 열매가 아닙니다. 주님과 연합할 때에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주님께서 인정해 주실 열매도 맺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함이 있고 다양함 가운데에서 통일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사람을 부르실 때에는 가난한 사람부터 부자까지, 배운 사람부터 못 배운 사람까지 한꺼번에 교회에 두셨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만을 교회에 놓고 끼리끼리 잘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기 때문에, 만나면 성격이나 경험이나 생각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서로의 그러한 다른 점들을 획일화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일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하는 것들을 재해석하고,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있는 다양함을 드러내면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교회 안에서 다양함과 성숙함이 드러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감사할 수 없으며, 끊임없이 비교하고 때로는 시기하거나 때로는 남의 눈을 의식하며 행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우리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범사에 감사하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감사하지 않는 것을 회개하지 않는 것만큼 큰 죄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세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감사할 만한 새로운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나라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붙잡고 나아가는 나라입니다. 그 안에는 다양함과 조화가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면서 그러한 모습을 잘 나타내면 이것이 교회의 능력이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조금 얻었다고 감사하거나, 어떤 문제가 잘 풀렸다고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할 만큼 새로운 나라를 주셨고 그것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은혜이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은혜’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복음입니다. 복음을 잘 붙잡고 있어야 바르게 감사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복음을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제대로 지킬 수 있습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마음에 원망이 생기는데, 그러한 원망은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면 평안한 마음을 품고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수 있지만, 요동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살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의인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지만 악인의 마음은 더러운 것을 솟구쳐 내는 바다와 같다’(사 57:20-21)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늘 불평하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감사하면서 살아가려면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복음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