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제 8장 한국 교회 재건과 분열 - 3

 

3. 민족 분열과 교회의 분열

 

공산당에 대항해 투쟁하던 목사들 순교.

6.25때 여순 반란사건시 두아들을 잃은 손양원 목사, 김익두, 남궁 혁, 송창근 목, 그리고 많은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이 납북됨.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고 손실된 교회 수가 장로교 152, 감리교 84, 성결교 27개 구세군이 4개 교회였고 순교자도 많았다  

6.25때 서울은 북괴에 동조하는 교인들이 몇 있었다. 경동교회에 출석하는 김욱이라는 자는 기독교 민주 동맹을 Y.M.C.A 건물에 걸고 김일성이 서울에 왔을 때 환영식을 함.

6.25가 나기전 기독교 사상범으로 투옥되었던 최근식 목사는 교도소에서 나와 목사들을 고발 해 북괴군에 의해 끌려가도록 했다. 19504월 경남 부산을 중심으로 해서 장로교에서 교회 재건 운동이 있었다

6.25가 터져서 모든 지방이 공산화가 되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부산으로 모임. 19515월 당시에 정기 총회를 소집했으나, 이 때 출옥성도들과 일제 때 영창에 들어가지 않았던 사람들간에 의견 대립이 생김.

 

비고려파와 고려파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결국 비고려파가 장로교에서 갈라져 나감. 싸움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같은해 7월 서로 무서운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고려파는 그당시 국회의원22명의 명의로 비고려파를 용공단체라고 비난함. 1953년 기장과 예장이 갈라짐. 조선신학교의 김재준목사의 신학이 신신학이라고 해서 그 문제를 총회에 제출했고 신학생 51명이 학교를 나가 장신대를 세움. 1953년 정기 총회에서 조선신학교를 나온 사람은 목사 안수를 예장에서 받을수 없다고 해서 갈라짐.1958년에 같은 예장에서 통합, 합동으로 나뉘게 됨. 학교 부지 관계 때문에, 부정이 있었음을 들고 일어나서 박형용 박사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자들로 각각 나뉘게 되었다. 그 후 합동에서 핵분열 처럼 갈라져서 백개가 넘는 교단이 생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