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제 7장 한국 교회의 수난사-3

 

4. 교회내의 난기류

 

1920년대 부터 지적인 변화, 경제적 빈곤, 일제의 탄압심화등으로 목회자 양성이 쉽지 않았다. 그 당시 소설가 이광수 왈 " 기독교는 이성을 경멸, 종교외의 과학, 모든 다른 사상르 경시하는 풍조를 낳아서 현세를 무시하고 죽어서 천당만 가려고 든다"고 혹평. 그 때 사회는 소망이 없었으므로 목사들은 재림, 즉 이세상 보다는 저세상을 바라는 설교를 했다. 이러한 때 신비주의자들 등장 - 소망을 심어줌.

 

1.이용도 목사 : 협성신학교 졸업. 감리교 목사. 교파 초월 부흥사역. 각교회를 돌아다니며 민족의 고난에 울었고 교회 형식주의를 비판. 전형적인 경건주의자의 모델. 진리는 말에 있지않고 삶에 있다고함.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곧 삶이. 믿음보다 사랑에 진리가 있다. 요한 복음서를 제일로 생각. 그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방했고 심지어는 사탄, 불경, 사회주의 책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다고 강조. 신학과 기독교 교리를 공격함으로서 신비주의 공통의 오류에 빠짐. 그의 절대적인 사랑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혈관적 연관을 잇는다고 믿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여김. 이때 한국교회는 이용도 목사에게 금종령을 내렸고 평양 장로교에서는 그를 부흥사로 초청하지 못하도록 함. 그리고 그가 속해있던 감리교는 1933년 그에게 휴직 처분함. 얼마후 결핵으로 사망.

 

2. 길선주 목사 : 계시록 12백번을 독파. 신구약 성서를 30. 절망과 고통 가운데 헤매는 사람들에게 주예수의 강림에 대해 말하고 설교의 주제는 항상 '마라나타'였다. 그에 의해 세례받은 자는 3천명 또한 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로 돌아온 자가 7만을 헤아렸다.

 

3. 황국주 : 백일 기도 중에 은혜의 체험을 했다고 함. 그는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차려입고 예수그리스도와 비슷한 풍채라고 하기도 함.예수 그리스도와 영 육간의 합일이 이루어져 자기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왔고, 자기 목소리는 예수의 목소리로 변했다고 했다. 가 가는 곳마다 그를 보고 모여드는 신자가 많았다. 심지어는 가정을 버리고 따

라 다니던 유부녀들도 있었다. 그가 서울역에 왔을 때에는 전국 교회가 떠들석 했다. 그는 삼각산에 가서 기도원을 차리고 그곳에서 몸가름, 피가름을 하였다. 황국주가 죽은 후 그의 피가름 교리가 통리교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