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제 5장 한국 프로 테스탄트의 형성과 부흥-2

 

3. 성서와 성례전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 성서와 관련하여 출발했다고 얘기할수 있다. 18854월에 인천에 처음 도착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손에는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성서가 있었다. 그당시 사람들은 성서 공부에 관한 열정이 대단하였. 한 선교사 왈 " 이세상의 모든 성서가 불타 없어져도 한국인 5명만 모이면 성서를 재구 성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란?

루터 :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어야 존재 가능 하다고.

칼빈 :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제 4부에 보면 루터와 마찬가지로 말씀과 성례전의 중요성을 얘기함.

우리 나라는 말씀에 대한 열정은 컸지만 성례전에 대한 의식은 약하였다. 오늘 날도 그런 경향이 있다.   

* 교회에서의 말씀과 성례전은 균형 울 이뤄야 한다.

 

4. 선교지역의 분할과 선교 정책

한국에는 많은 선교회가 조직됨.

장로교 - 북 장로교 감리교 - 북 감리교 남 장로교 남 감리교 캐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이러한 많은 교단에서 선교지 분할 정책을 쓰게됨.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선교. 이 외에 이미 선교가 시작된 곳은 북장로교가 맡음.

부산(경상도)은 호주 장로교,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교가 맡음.

1905년 을사보호 조약 체결. 장로교와 감리교 간에도 지역 조정이 있었다. 연변 중심의 지역은 북감리교, 평북 지역은 북장로교. 1908년 남감리교는 강원 북부 3분의 2와 경기도 서울 이북을 장로교로부터 모두 떠맡게 . 북장로교는 강원 남부 3분의 1, 서울 동부, 서울의 남감리교 지역을 다 떠맡음.

 

* 선교 정책을 보면,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신학 사상은 보수적, 경건주의자들 이었다.

저들이 한국에 왔을 당시 한국은 - 샤머니즘 : 무지함에서 생김. 유교 : 형식주의, 허례허식, 불교 : 미신적임.

- 위의 3가지의 사상에 어느정도 젖어 있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중국에 주재하던 선교사 John Nevius를 초청하여(1890)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선교사업을 위한 원칙을 세웠다. -'삼자(三自)정책'

1)Self-propagation 자력전도 : 스스로 전도하게 한다.

2)Self-goverment 자치제도 : 스스로가 교회를 관리, 운영하게 한다. 자치 제도 마련

3)Self-suport 자치자립 : 자급목회를 하게 한다.

 

5. 1907년대 부흥운동  

1882년 임오군란(직업군의 군량미 부정 사건)

1884년 갑신정변(개혁파와 수구파간의 구테타)

1895년 청,일 전쟁

1905년 러,일 전쟁

이러한 일로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망이 없었고 의지할것도 없었다. 정치, , 도덕, 정신적으로 절망 가운데 빠짐. 그래서 평양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95년 서울에 주재하던 선교사가 "한국의 실정을 변해가며 일반 백성들 사이

에 각성의 기미가 보인다"고 보고함. 1895년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 인구가 5301896년에는 3276, 1900년대 와서

7690명으로 늘어났다. <교회성장 요인들> - 당시 황실 고위층과 선교사들 간에 친밀한 관계였다. 1895년 일본 자객에 의해서 민비가 살해되자 위협을 느낀 고종황제는 피신을 하였는데 그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였지만 선교사들의 말만은 믿었다. 한국에는 미국인들이 250명이 있었는데 그 중 절반 정도가 선교사였다. 선교사들은 선교 사역 뿐 아니라 조선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게는 선교사들이 눈에 가시였다.

  당시 배제학당의 교사였던 이승만을 비롯, 서재필, 윤치호를 중심으로 해서 배제학당 안에 소위 '협성회'를 조직해서 애국운동을 벌였다.이 협성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청년 운동의 시발이었다. 그러나 좀더 체계적인 것은 189310'황성 

기독교 청년회'가 조직됨.(오늘날의 Y.M.C.A가 됨) 서울 종로 2가에 '황성 기독교 청년회'3층 양옥을 건립하고 황태자(순종)가 여기에 참석해 낙성식을 치뤘다. 황제를 비롯해 이또오 히로부미와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었다. 이 청년회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 체육, 공업 교육에도 영향을 끼쳤다. 1896년에 서재필은 독립 신문을 발간한다. 그는 그 신문을 통해 대중계몽에 성공을 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그리고 중국 사신이 오면 환영하던 모화관을 없애고 그곳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다. 또한 서재필, 윤치호, 홍정우등은 주일마다 집회를 열어 자유사상과 민주주의를 고취시킴. 우국열사들이 정부의 부정부패를 공격하자 저들은 심한 불쾌감을 갖고 마침내 189812월 독립협회를 해산시켰다. 선교사들은 감옥을 방문해 그들에게 전도를 해서 19013월에 17명중에 12람이 함께 세례를 받는다.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문서 전도와 문예 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개화  운동에 힘쓰게 되는데 1899년 언더우드와 뜻있는 사람들이 '성교서회'를 건립(후에 기독교 서회로 바뀜)하여 正音(한글)으로 문서를 발행한다. 1903년에는 이 기독교서회를 통한 출판부수가 25만부나 되었다. 마침내 1907년 우리나라에서 부흥회가 일어났다. 이 부흥회가 일어나기전 1903년에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인 하디가 기도하던 중 영감을 받았다고 그 체험을 동료선교사들에게 간증을 했는데 이것이 평양선교사들에게도 퍼져 그 이후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가 함께 모여 합동 집회를 연다. 그래서 이들은 마침내 190716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집회를 연다. 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은혜를 사모한다.

블레오 선교사가 고전 12:27의 말씀을 읽자 불이 붙어서 - 길선주 장로의 간증을 통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남.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상을 바꿔 놓았다. 인격적, 소박한, 공동체적신앙으로 바뀌어 졌다

1900년대 영국 웨일즈 지방의 탄광 - 무기력함과 무희망적인 삶을 살던 광부들 -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짐. - 180도 달라지는 그들의 삶이 일이 미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1907년 부흥운동을 갖게함.

 

6. 교회 행정 기구의 설정

19079월 평양에서 장로교 독노회 창설 그리고 이 때 평양 신학교에서 배출된 7 의 목사가 안수를 받는다.(서경조, 이기

, 길선주,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한승백)

1907- 1910년 사이에 한국 교회는 일본, 중국, 만주, 시베리아, 미국 등에 선교사를 파송한다. 그후 100명 구령운동이 일어남. 감리교는 1901년 김창식과 김기방이 안수를 받는다. 감리교는 처음부터 남,북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들이 독자적인 노선을 걷다가  1907년에 합동해서 하나의 조선 감리교를 세우고 목회자 양성을 위해서 신학교를 세움. - '협성 신학교' 그 후에 와서 1930년대에 기독교 조선 감리회라 이름을 바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