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한국 프로 테스탄트의 형성과 부흥-1
1. 개국과 미국 선교사들의 내한
(1)의료와 교육 사업(우리 나라는 의료와 교육이 필요함을 느꼈다)
중국에 의료 선교하던 알렌 박사가 1884년 9월 20일에 의료 선교사로 자청해서 우리나라에 옴. 같은해 1884년 10월 4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갑신정변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을 세워놓고 낙성식을 하는데 내노라 하는 우리나라 인물들이 참석했는데 수구파(엣것 지키려는, 대장은 민비의 오라비 민영익)와 개화당(개혁으로, 대장으로 박영호, 김옥균)이 있었는데 개화당 사람이 민영익을 칼로 찔렀음. 개화당이 3일 동안 천하를 이루다가 다시 흩어짐. 이때 알렌이 민영익을 고침.(한의사 14명은 실패했는데) 이것 때문에 알렌의 인기는 치솟음. 알렌은 그래서 궁중 시의가 되어 모든 왕족, 고관을 치료함. 민영익은 알렌에게 고맙다는 표시로 10만냥을 사례함. 이돈으로 알렌은 왕립 광혜원을 설립.이 병원의 설립 2주후 고종황제가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줌. 제중원 - 나중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명. 당시 의대가 파리 날렸는데 백정인 白哥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아들이 콜레라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세브란스 의사들이 살려 주었다. 의사들이 그 아들을 세브란스 의사로 만듬.
1885년 4월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선교사로 오는데 문을 열어주는 도움을 주게 되는 배경은 알렌이 병원으로 정부에 호의를 준 영향이 크다.
(2)교육
멜렌 도르프 : 영어 강습소 생김.
우리나라 조정에서 외교관, 통역관 양성 목적.
한국정부 : 미국 정부에게 현대 교육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
헐버트 1884년에 육영공원(영재를 교육하는 공적인 학원)- 최초의 미국식 학교인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다님.후에 나라에서 이런 학원을 닫게하자 선교사들이 교육에 직접뜀.
2. 선교 활동과 조직 교회의 출현
1885년 4월 5일(부활절) 알렌의 뒤를 이어 호레스 언더우드와 아펜 젤러가 우리나라에 도착함.(그때는 당장 전도할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1887년에 언더우드가 솔래 교회에 가서 7명의 신도에게 세례를베품. 1887년 9월 27일에 언드우드가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림.(14명과 같이)- 이교회가 세문안 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10월 9일에 아펜젤러는 또 언더우드 처럼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렸다(정동 제일교회의 전신이다.)
1887년 아펜젤러는 정동 자택에서 교회만 아니라 학교를 세움(2명으로시작)
- 1주년이 되는때에 고종황제께서 배재학당(인재를 배출하는)이라는 이름을 줌.
(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들어온후 들어온 선교사) 스크렌턴(감리교 의료 선교사)의 어머니 미세스 스크렌턴이 자기 사랑방에서 정부 고관 부인 2사람을 데리고 학교 시작- 이화여대 전신(1885) 1886년에 고종 황비의 아내 민비가 이름을 줬는데 이화학당이라 했다. 이런 학교들에는 학생이 별로 없었는데 그 이유는 선교사들에 대한 오해가 많았다. 당시 선교사들은 모유보다 우유를 먹이는등 자기들도 먹고(악성 우유통 루머번짐) 광이문(서소문)밖에 콜레라 환자들을 버렸는데 스크렌턴의 모친이 그중 1명의 소녀를 데리고 와서 아들이 고쳐서 이 학교 3회 졸업 소녀가 된다.
1886년 정동의 언더우드 사랑방에서 고아원 스타일의 학교를 시작했는데 1891년에 와서 예수교 학교로 바뀌고 1905년에 경신 중고등 학교로 바뀜.- 나중에 정신 여자 중고등학교로 바뀜. 북한에는 숭실 전문학교, 숭의 전문 학교, 광성 중고등학교.
1892년에는 미구 남 장로교에서 파송한 레이놀즈와 6명의 선교사가 입국해 전라도 쪽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예수병원"을 설립했다.
1893년 카나다 연합교회에서 와서 함경도 선교함. 동년 동양 선교회가 들어와 년 성결교회를 시작 동년은 영국 구세군이 들어와 선교 시작
1903년에서 1905년사이에 하와이로 이민가는 사람이 늘었다.(당시 7300명 정도였는데 이중 윤은현, 손흥조가 일본에 들렸다가 안식교 전도사를 만나서 돌아와 한국에서 안식교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