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 제3장 수난 당하는 로마 카톨릭 - 2
c. 황사영의 백서가 문제됨 : 한국 카톨릭의 4대 박해가 있었는데
1. 신유 박해(1801년) : 황사영(경상도 창원사람)은 정약전의 형 정약용이?
* 주신부에게 영세 받음. 17세에 진사 급제를 함.
박해가 시작되자 충북제천 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를 찾아온 황심을 만남.
(천주교 구하기 위해 북경의 주교에게 편지 보내자고 약속. 그 편지는 길이 62센티 폭 38센티의 비단에다 작은 글씨로 만 삼천자의 글로 보냈는데 내용은 박해와 참상을 보고 하는 것인데 그만 도중 들켜서 조선 조정에 밝혀짐)
* 이 백서가 들켜 카톨릭은 매국종교로 지탄 받게됨. 아래는 백서 내용이다.
1). 조선 천주교의 실상을 기록하고, 그래서 많은 순교자가 생겼 다는 내용.
2). 당시 정계의 사색 당쟁의 실상을 기술. 박해의 이유는 당쟁 때문이라고 말하고 이것 때문에 경제적으로 교인이 열악하다고 기술.
3). 중국의 신도 1명을 택해 북경 지대에 점포를 개설해서 청국과 조선사이에 통신 연락을 하게하고, 북경의 청국 황제를 움직여서 조선 왕으로 하여금 서교를 받아 들이게 하도록 압력 부탁, 또 중국의 공주를 조선조 왕자에게 정략 결혼시켜 조선을 굴복 시키고 서학을 받아들이도록 부탁, 또 군함과 군수 물자를 실고 와서 이 나라를 치라고 부탁. 나라는 망해도 천주교는 전파되야 한다고 함.
* 황사영은 1801년 27세의 나이로 모반죄에 의해 참수되고 이 사건으로 300명 이 순교하였다. 이것을 신유박해라고 한다.
* 신유박해 이후 서학의 창대를 염려하여 쇄국 정책을 조선에서는 실시. 북경외의 모든 문을 닫아 버림.
* 헌조의 명을 따라 발표된 책들이 : 척사윤음이 나왔고 대외쇄국강저, 안정복 (천학고), 천학문답, 김치진(척사론)
2. 기해 박해(1839)
* 신유박해 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북경 주교에게 성직자 보내 달라고 신자들이 요청.
* 정약종 아들 정하상이 있는데 1816년 2차례 걸쳐 북경의 신부에게 요청 했으나 여의치 않음.
* 1827년 정하상의 편지가 라틴말로 번역되 교황에게 알려져 그레고리 16세 (교황)은 조선교구를 북경 교구에서 분립 하기로함.
* 초대 주교로 브르기에를 임명함.- 1831년
* 그레고리 16세 교서에서 첫째로 교회를 양떼로 보지 않고 목장으로 봤다. 둘째로 성직자는 공고 교리, 성례전을 위해 파송한다. (즉 천주교는 교리와 구역을 더 중시함을 알수 있다.)
* 브리기에는 부임 하지도 못하고 객사함.
* 1835년에 1대 주교가 객사하자 블란서에서 신부들을 파송하는데 그중 모팡이라는 신부가 상복 차림으로 압록강 통해 상륙.
* 2대 주교로 앙베르가 우리나라에 잠입해 옴. 샤스텡이라는 블란서 신부가 그후 또 옴.
* 이 세사람의 신부를 통해 카톨릭 부흥.
* 헌종 5년 (1839)에 2차 박해 시작. 당시 영의정 이지현이 사학박멸을 주장하자 순원 황후가 허락.
* 정하상을 비롯한 100명의 교도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 당했고 나머지 세 신부는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 당했다.
* 상제 상서를 정하상이 책을 바침. 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함.
* 당시 척불숭유 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 말함-강조)
3. 병오 박해(1846)
이 박해전 1845년 앙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페레올 주교가 조선 사람으로 최초의 조선 안수 받은 김대곤 신부와 한성에 잠입한다. 6개월후 김대곤은 외국인 신부 안내 신부라는 일을 하다 군교에게 잡혀 들어감. 1846년 김대곤 신부 처형(살려주려고 했으나 끝내 믿음 지킴) 이 이후로 많은 무서운 박해가 시작 되었는데 이것이 병오박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