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직 신앙고백서 강해 - 5항. 성경의 권위
5항. 우리는 이 책들 전부를 그리고 오직 이것들만을 우리 신앙의 규율과 기초가 되고 그것을 확증할 수 있는 거룩한 정경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데, 그것은 교회가 받아들이고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성령님께서 특별히 증명하시기 때문이고, 또한 성경 스스로 그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경이라 할지라도 성경의 예언들이 성취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성령님의 증거
우리가 성경을 받는 첫째 이유는 성령님의 증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성령님께서 특별히 증명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신 하나님 자신이 마치 법정에서의 변호사처럼 타락한 인간에게 그것들은 정확히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 양심에 증거하고 있습니다(nostris conscientiis testetur). 우선은 이것이 주관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 심령의 증거가 아니라 성령님의 증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영감하시고 그들로 기록하도록 인도하시고 이 세상에서 자신의 말씀이 보존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분은 객관적으로 그것들을 증거하시지만 우리는 주관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성령님의 이 사역은 교회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고전 2:14, 12:3; 고후 1:22; 엡 1:13-14; 살전 1:5-6, 2:13; 요일 4:1-6; 5:6-13).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스트라우스Strauss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 너무나 강력하게 집중하는 성격은 다소 부정적인 측면이 될 수 있다. 일례로 벨직신앙고백서에서 성령님에 대한 간결한 인용은 여러 정신적이고 사변적인 사고들을 유발시킬 수 있다."
칼빈의 인도를 따라서 신앙고백서는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 그리고 억측에서가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높은 근원, 곧 성령님의 은밀한 증거에서 확신을 찾아야 한다”고 증거했습니다. 실제로 칼빈은 계속 말하기를 “그러나 논쟁을 통해서 성경에서의 신앙을 견고히 세워가려고 애쓰는 사람들 은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 성령님의 증거는 일체의 이론을 훨씬 능가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이런 비밀스럽고 내적인 증거(testimonium Spiritus Sancti internum)는 말씀과 동떨어진 신비한 경험의 일부가 아니라, 말씀을 통한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칼빈의 말로 하자면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 관계를 통해서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님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셨으므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빛을 비춰 주실 때에 우리 마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이 머물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곧 그 말씀을 따라 그를 인식할 때에 우리는 속는다는 두려움 없이 성령님을 마음에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이제 우리는 대적자들이 성령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인 지를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 이상한 교리를 추천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이름을 사용할 뿐이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끊을 수 없는 유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결합되기를 원하시며, 그리스도께서도 교회에 성령을 약속하실 때에 이 점을 확언하셨다.
성경의 자증(自證)
신비스러운 말씀과 성령 사이의 상호 작용이 우리가 구약과 신약 66권을 정경으로 받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성령님은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증거 하시고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을 영감 되고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프랑스 신앙고백서는 단지 “성령님의 내적 증언과 조명”(4항)이라고만 언급한 것에 비해, 우리가 아는 것처럼 여기 벨직 신앙고백서는 그 책들은 정경이고 성경이 자기 증명이라는 두 번째 이유, 즉 “성경 스스로 그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경이라 할지라도 성경의 예언들이 성취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덧붙이고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개혁파 성도들처럼 우리도 “소경이라 할지라도 성경의 예언들이 성취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성경 자체의 증거(autopistos)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성취된 예언에서의 성경의 자증은 마치 소경이라도 그들의 감각으로 깨달을 수 있을 것(veluti sensibus percipere possint)이라고 할 만큼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왜 소경조차 깨달을 수 있다고 했을까요? 그리고 어디에서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일까요? 약속과 성취의 관점에서 성경의 조화로운 통일성에 관한 풍부한 예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이 400년 동안 노예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나(창 15:13-16)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예언이 탄생하기 700년 전에 주어졌다는 것(사 7:14; 마 1:23 참고)들에서철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태어나기 수백 년 전에 페르시아의 키루스를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기까지 했습니다(사 45:1). 구약은 주님의 고난(사 52:13-31:12), 죽음에 대한 상세한 묘사(시 22), 부활(시 16), 그리고 성령의 강림(요엘 2)에 대해서 상세히 예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고 계속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 계속된 말씀은 우리와 수천의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들으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했다 ... ,” 또는 “나는 음성을 들었다 ... ,”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성경 안에서 뿐입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눅 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