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37 주일
(성경구절) 전 5:1-7; 마 5:33-37; 10:32-33



99. [질문] 하나님은 셋째 계명에서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대답] 우리로 저주나 위증이나 불필요한 서원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거나 욕되게 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침묵으로 혹은 방관함으로서 그 같은 흉악한 죄에 참여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경외와 존경심을 가지고 사용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르게 고백하고 예배하며 우리의 모든 말과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100. [질문] 맹세와 저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은 그것들을 막지 않고 방관하는 자에 대해서도 진노가 임할 만큼이나 중대한 죄입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보다 더 그분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죄는 사형 죄로 벌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101. [질문] 하나님의 이름으로 경건하게 서약할 수 있습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이웃의 복지를 위하여, 충성과 진리를 지키기 위해 정부가 요구하거나 그럴 필요가 있을 때는 서약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서약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고 신구약 성도들에 의하여 올바르게 사용되었습니다.

102. [질문] 거룩한 성도들이나 다른 피조물들에 의해서도 서약할 수 있습니까?
     [대답] 아닙니다. 합법적인 서약은 하나님의 이름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고 진리를 증거하며 만약 잘못 서약하면 나를 책망하십니다. 이러한 영광은 다른 피조물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 계명은 십계명의 처음 두 계명을 근거로 생각해야 한다. 첫째 계명에서 참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예배의 대상임을 배웠다. 두 번째 계명에서 예배의 올바른 방법이 무엇인지를 배웠다(하나님께서 규정 하신대로). 이 계명을 통하여 우리는 예배의 올바른 태도를 배운다.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는다"는 중심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한 여자가 자기 남편의 이름을 취하는 것은 그녀가 결혼의 서약을 할 때이다. 이 서약을 통하여 그녀는 자기의 남편에게 전적으로 헌신할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결혼의 언약을 파기하고 불성실할 때에 그녀는 자기 남편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게 된다. 비슷한 방법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소유하는 특권을 갖는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고 언약을 파기하는 자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된다. 지혜로운 솔로몬이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급한 마음으로 말을 하지" 아니하도록(전 5:1-2) 경고했다. 사실상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5절) 좋다.
        만약 우리가 이 계명을 비그리스도인들로 부터 듣는 경솔한 의미로만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존중하여 말해야 한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에 경외심과 예배하는 마음으로 언급해야함은 당연하다. 이 계명이 오늘날 일반적인 서약에서 잘못 사용되어짐은 사실이다. 이에 대한 주된 책임은 먼저 성도들에게 있다. 우리는 불신자들이 불필요한 서약을 하고 저주의 말을 사용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요리문답은 "다른 사람들이 이런 흉악한 죄를 범할 때, 우리가 침묵을 지켜 묵인함으로 그 죄에 동참하지 말아야 할 것"에 초점을 둔다.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그 주위에서 항상 저주의 말들을 듣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진실로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다. 참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보고는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나는 어떤 광고를 보고 내가 원하는 것을 사기 위하여 갔었다. 나는 물건을 파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기독교 신앙에 관하여 이야기를 했다. 그때 매우 놀라운 일이 생겼다.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 가게에 들어와서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더러운 농담을 했다. 그때 그 옆에 있던 한 사람이 그곳에서 주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이야기를 더 이상 듣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비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은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다. 맞았다. 그 사람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우리 교회의 교인이었다. 그는 주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듣고 그 말에 대하여 침묵의 항의를 했기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이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그러한 엄숙한 경고를 이 계명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키셨을까? 완전히 외적이고 피상적인 신앙의 위험 때문은 아닐까? 예를 들어 내가 개혁 교회에 속하였다고 가정하자. 이것이 매주일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인가? 이것이 곧 바로 진정한 교회이며, 주일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올바른 예배를 드렸다는 뜻인가? 여기에 함정이 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바른 예배를 드렸다’고 자만할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함으로 예배를 드렸는가?" 만약 내가 그렇지 못했다면, 비록 이런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게 한 예배는 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이 경고가 여기에 있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모두는 "우리의 마음이 그 속에 있어야 한다" 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제 3 계명의 의미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구원을 받겠는가? 베드로? 베드로는 주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했다. 그러나 베드로의 죄는 용서 받았다. 이 계명의 경고는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면 영원토록 저주를 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그가 그의 죄를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면 용서함을 받는다(베드로처럼). 그러나 회개하고 믿음을 갖고도 자기의 죄에서 떠나지 않으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거절당할 것이다(마 7:21-23).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를 망하게 만든다. 전 세계의 교회에는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을 하면서 생활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워 할 줄 모른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그들은 교회 당회의 권위를 존경하지 않는다. 자기들이 원하는 데로 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제 3 계명을 어기는 무서운 죄이다. 하나님은 위선자들을 미워하신다. 위선자들은 거짓된 가면을 쓰고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해야함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주님께 전혀 복종하지 않는다. 여기에 하나님의 진노가 크게 임하지 않겠는가?
        주님의 산상 설교 중에서 종종 잘못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된 전통과 성경의 참된 의미 사이의 대조하며 주의깊게 다루신다. 주님께서 "너희가 들었으나"를 여러 번 말씀하셨다(마 5:21, 27, 33, 38, 43). 이것과 "기록되었으되" 라는 말씀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백성이 "들은 것"은 예수님께서 비판하시는 것과 반대의 의미로서 잘못된 해석이다. 잘못된 전통에 따르면 두 가지의 서약이 있다. 하나는 사람이 실제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한 후에 자기의 서약을 지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여호와의 이름은 피하고 "그의 발등상 혹은 예루살렘 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서약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거룩한 예루살렘에 대하여 서약한다"고 말했다면, 이것은 직접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약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두 번째의 서약의 방법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성전이나 예루살렘 성에 대하여 서약을 하는가?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들이 서약을 지켜야 하는 책임은 생각지 않고 자신들의 유익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위선적인 행동을 알고 계셨다. 주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마 5:34, 37)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맹세나 서원이 무조건 나쁘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마 5:17). 신 10:20 에서 하나님이 맹세와 서원을 명령하셨다. 우리 주님은 맹세함으로 대제사장에게 대답하셨다(민 5:9; 마 26:63). 물론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아는 사도들도 그렇게 하였다(고후 1:23)
        만약 온 세계가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맹세나 서원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참된 성도들은 단순하게 예, 아니오라는 말을 통하여 충분한 순수함과 진실함을 가져야 한다. 진실로 이것들이 참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품질 보증의 표시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무슨 말을 할 찌라도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악하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 때까지 맹세와 서원이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맹세와 서원이 나쁘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단지 이것들이 악으로부터 온다고 하셨다. 예를 들면 법원은 여전히 사람들의 서약이 필요하다. 그러므로서 죄인들은 잠시나마 그들의 말에 대한 심판이 있음을 기억하게 된다. 서약은 거짓과 왜곡, 그리고 위증의 경우를 감소시킨다. 그리고 결혼식에서 서약이 있고 또한 교회에서도 교인들에 대한 서약이 있다. 합법적으로 세워진 권위에 의한(교회나 국가) 서약을 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절하지 말아야한다.

        요리문답이 기록될 때, 주님은 산상 설교에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한 상황과 비슷하였다. 백성들은 성 유다와 흑은 성 마리아의 이름으로 서약하였다. 성인들은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거짓 맹세에 대한 무서운 벌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마 5:34-35). 맹세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우리말의 신실성과 순수성을 판단해 주시기를 바라는 우리의 청원이다. 참된 판단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으며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서약하는 큰 죄이다.

      세 번째 계명은 엄숙한 경고를 포함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위협적인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맹세를 전혀 하지 않는다. 어떤 것을 금하는 모든 계명들은 다른 것을 하도록 명령한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실함과 진리로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도록 하는 것이다.


[질문]
1. 하나님의 이름을 일컫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이 계명의 경고에 대하여 베드로의 실례는 무엇을 증명하는가?
3. 산상 설교에서 "너희가 들었거니와"의 말에서 예수님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4. 예수님의 가르침이 맹세를 전혀 금한 것이 아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5. 맹세는 우리의 의무인가?



[연구와 토의를 위한 문제들]

1. 맹세와 서약을 금하는 종교 단체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들은 무엇을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하는가?
2. 당신이 생각하는 나쁜 언어들의 형태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언어들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추잡한 말들을 사용할 수 있는가?
3. 어떤 상황이 신성모독에 대항하여 말할 수 있는 상황인가? 당신의 종업원들에게 하나님께 모욕적인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할 권리가 당신에게 있는가?
4. 그리스도인들은 신성 모독적인 말과 비도덕적인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면, 강조해야 하는 일들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