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제 25 주일
성경구절 롬 10:17; 고전 1:26-32; 창 17:1-14; 골 2:11-12
65. [질문]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참여하도록 한다면 이 믿음은 어디에서 생긴 것입니까?
[대답] 성령께서 거룩한 복음의 설교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믿음을 움직이시며 성례를 통하여 확증합니다.
66. [질문] 성례는 무엇입니까?
[대답] 성례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하고 눈에 보이는 표와 인침(sign and seal)입니다. 성례를 통하여 하나님은 복음의 약속을 우리에게 더욱 확인시키시고 표증합니다. 즉 성례는 유일한 희생제물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속죄와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주심을 선포하고 표증하는 예식입니다.
67. [질문] 말씀과 성례 이 두 가지가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믿음에 이르게 합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구원사역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희생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복음을 통하여 가르치시고 성례를 통하여 확신시켜 줍니다.
68. [질문] 그리스도께서는 신약 성경에서 몇 개의 성례를 제정하습니까?
[대답] 세례와 성찬 두 가지입니다.
만약 복음이 신실하게 선포되어야 한다면, 차별 없이 모두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부를 선택하셨고, 나머지는 선택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누가 택함을 받았고, 누가 택함을 받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어디에서든지 복음(좋은 소식)을 전파하라는 것이다. 좋은 소식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회개하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거절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두 곳에 있다. 즉,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그 이유가 있든지 아니면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궁극적인 이유를 인간에게서 찾으려 한다. 그들은 "그레이스는 브라운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선행이 조금 더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레이스가 예수께로 나온다"고 말한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브라운은 악한 일을 행하였기 때문에 믿음이 없다. 그레이스는 성령께 저항하지 않은 반면, 브라운은 성령을 거역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 인간은 모두 동일한 죄인이라고 말한다. 우리 모두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이다. 이것이 자연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위의 말들은 잘못된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고 말씀한다(빌 1:6).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할 수 있고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6:63)고 말씀하셨다.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속에 믿음을 존재케 하고 성령과 함께 중생의 역사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캄캄한 어둠속에 앉아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가 어둠에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빛이 없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가 소경이기 때문이다. 그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이 그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어야 한다. 한 사람은 그에게 불을 켜 주고 한 사람은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불을 켜는 것과 같다. 말씀을 듣는 사람은 모두 빛에 노출된다. 중생(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사람의 시력을 회복하는 것과 같다. 중생은 영적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중생과 설교는 모두 근본적인 일이다. 궁극적인 대답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에 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중생시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음에서 살리셨기 때문에 그들은 복음의 요청에 응답할 수 있다.
많은 성도들이 성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성례의 본질과 기능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나에게 "나는 성례식을 통해서는 유익을 별로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설교를 통하여 더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문제는 그가 성례식보다 설교나 다른 어떠한 것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직 한 복음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파된다. 만약 우리가 성례는 표(sign)와 인(seal)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이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롬 4:11).
예를 들어 보자. 반갑게 악수하는 것을 참된 우정의 표시라고 간주하자. 만약 당신이 나의 친구이며, 내가 당신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면, 당신은 분명히 나에게 반가운 악수를 할 것이다. 그러나 악수 그 자체가 우리를 묶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묶는 것은 서로의 존경심과 사랑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수는 매우 중요하다. 친절한 악수는 서로의 우정을 굳게 한다. 악수는 우정의 실체의 표시(sign)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악수로 이루어지는 우정의 표시 이전에 이미 우정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나의 졸업장은 내가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졸업장에 신학교의 도장(seal)이 찍혀 있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 도장에 첨부된 권위는 졸업장이 말하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도장 그 자체가 나를 목사로 준비시킨 것은 분명히 아니다. 나의 준비는 오랜 시간에 걸친 교수들의 가르침에 있었다. 졸업장의 도장이 증명하기 이전에 이미 나는 가르침을 받았다.
내 친구가 설교를 통해서는 은혜를 받지만 그러나 성례를 통해서는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상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악수에서 오는 느낌은 이미 존재하는 우정의 느낌과 차이가 없고 동일하다. 나의 졸업장에 찍혀있는 도장의 메시지는 졸업장의 메시지와 차이가 없고 동일하다. 이것이 표(sign)와 인(seal)에 아무 것도 덧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악수는 우리의 우정의 따뜻함을 굳게 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덧붙여진 것이다. 도장은 그것이 선포하는 권위를 굳게 하기 때문에 졸업장에 어떤 것으로 첨가된 것이다. 성례도 마찬가지이다. 성례는 복음 선포에 그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다. 성례는 귀로 듣는 설교의 메시지에 확신을 첨가시킨다. 그것은 내가 나의 친구와 악수를 하면서 나 자신에게 “그는 참으로 나의 친구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성례식을 통하여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재 확신을 받는다. 예수님이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나를 구원했다는 사실을 재 확신 시켜준다.
로마 천주교에서는 일곱가지 성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오직 두 가지 성례만을 찾을 수 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례를 정하신다. 인간은 예수님의 명령 없이 성례를 제정할 권리가 없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례는 단지 성찬과 세례뿐이다. 우리는 다음에 이 문제를 토의할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를 정하여 주셨다는 사실이다. 명령하지 않은 것은 금하신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하여, "구원 언약의 표(sign)와 인(seal)으로 이것을 행하라"고 말씀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다섯 가지를 첨가시켜서 일곱 성례를 만들었는데 그 중에 두 가지만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나 다섯 가지는 주님께서 지키라고 명령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이 원리가 무시되는 것은 참으로 슬픈 사실이다. 몇몇 개혁교회들 조차도 이것을 거절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다시 살펴 볼 것이다.
[질문]
1. 만약에 어떤 사람들만 택함을 받았다고 하면 복음이 왜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하는가?
2. 왜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는가?
3. 어둠 속에 앉아있는 소경의 예화가 구원받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임을 가르쳐 주는가?
4. 성례 속에 있는 어떤 것이 복음에 없는 것이 있는가? 그것을 설명하라.
5. 우리 개혁교회가 로마 카톨릭이 가르치는 일곱 성례 중에 다섯 가지 성례를 거절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연구와 토의를 위한 문제들]
1. 신약의 성례 중에 세례와 성찬이 구약의 성례인 할례와 유월절과 어떤 점이 비슷하고 어떤 점이 다른가?
2. 많은 성도들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을 결정함으로서 중생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의 잘못된 점은 무엇인가?
3. 만약 성례가 복음 선포에 덧붙이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왜 우리가 성례를 지켜야 하는가?
4. 결혼이 성례로서 간주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