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
제 24 주일

성경구절 시 14: ; 미 6:1-18; 7:15-27; 25:31-46; 빌 3:1-16



62. [질문] 우리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의로움이나 부분적인 의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의는 완전해야 하며 하나님의 법을 완전하게 지킨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는 아무리 선해도 완전하지 못하며 죄로 더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63. [질문]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혹은 천국에서 상급을 주시는 일에 있어서도 우리의 선행은 아무런 공로가 되지 못합니까?
     [대답] 상급은 우리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됩니다.

64. [질문] 이러한 교리가 사람들을 나태하게 만들고 방종케 하지 않습니까?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은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기 때문에 감사의 열매는 반드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한다(요일 4:8). 그러나 이 말이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 어두움이 없다고 말씀한다(요일 1:5).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불균형한 가르침이다. 사랑을 강조하는 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는 양보되고 있다. 그러나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죄악과 타협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분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이것이 매우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완전한 사람은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함을 요구하는 것은 공정치 못한 일로 보인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완전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았다는 중요한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하지 않게 만드시고 그 상태를 정죄한다면 그것은 공평치 못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에 완전하게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고 그것을 요구하신다면 그것은 불공평한 일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본래 존재했던 능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에 우리는 함께 그것을 영원히 잃어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 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로움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함을 요구하신다. 완전함이란 헤어진 틈이 없는 옷을 말한다. 만약 오늘 하루를 죄를 짓지 않고 살았다  해도 이미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기준에 합당치 않게 된다. 물론 우리는 자신이 매일 매일 완전치 못한 삶을 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스스로 의롭게 된다는 생각 그 자체를 미워하고 포기해야 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한 삶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완전으로부터 큰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선행에 대하여 합당한 상급을 주신다. 사실상 심판의 큰 기준은 선행일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선행은 보시지만 사탄과 그의 사자들과 함께 불 못에 던져질 사람들의 선행은 보시지 않는다(마25:31-46). 그렇다면 하나님이 완전치 못한 선을 행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상급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은혜로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신다. 때때로 인간의 아버지도 아들이 행한 일이 기준 이하라 할찌라도 그의 아들이 행한 일에 대하여 상급을 준다(아들이 아버지를 위하여 흙이나 나무로 만든 첫 선물을 생각하라). 불완전하지만 아버지가 상급을 주는 것은 행한 행위 때문이기 보다는 그의 아들의 의도가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즉 그 행위 속에 사랑하는 마음을 흠이 없는 것으로 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날에 그의 자녀들에게 상급을 주시는 것도 이와 같다. 성도들의 선행 그 자체가 상급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선행을 유발시킨 믿음에 흠이 없기 때문이다.
        심판의 날에 상급 받을 선행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을 사람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후, 그 연합으로부터 나오는 선행이 전혀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과밭을 일구는 한 사람을 알고 있는데 그는 종류가 다른 나무에다 다른 가지를 접목할 수 있다. 때때로 가지의 생명을 유지하는 수액이 통하지 않아서 어떤 가지는 마르거나 죽기도 한다. 그러나 생명을 유지하는 수액이 그 가지를 통할 때는 살아서 열매를 맺게 된다.
        믿는 성도들도 이와 같다. 참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좋은 열매를 맺는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죽은 강도조차도 그가 그리스도를 믿자마자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관계를 갖자마자 그에게 열매가 나타난 것이다. 참된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우리의 주장에 대한 증거가 여기에 있다. 심판의 날에 아주 흥미로운 두 가지 일이 일어날 것임을 주님이 말씀하셨다. 첫째는 자신들이 행한 선행을 칭찬할 때에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마 25:37) 하면서 놀란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말을 한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그들은 자기들이 행한 목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말씀하셨다. 정확하게 무슨 차이가 있는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자기들의 선행을 자신의 공로로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께 불쾌감을 주고 있다. 그러나 참된 성도들은 자신들 속에는 공로가 전혀 없음을 바라본다. 반대로 그들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희생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이 행한 선행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 성도들의 선행은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심판의 날에 상급을 주신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유일한 선행은 우리가 자신의 공로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이다.

[질문]
1. 어떤 점에 있어서 유형교회의 많은 가르침에 균형이 깨져있는가?
2. 이렇게 됨으로 생겨난 결과는 무엇인가?
3. 우리가 완전함에 도달할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시는 것이 공정치 못한 일인가?
4. 성경이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 우리의 행위를 기준으로 삼는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5. 선행이 없는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
6. 그들의 행위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구원받는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연구와 토의를 위한 문제들]

1. 성도들이 천국에서 상급을 위하여 노력해야 하는가? 이 사실에 대하여 마 6:19-21에서 무슨 빛을 던져 주는가?
2. 만약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항상 선한 행위의 열매가 나타난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신앙고백을 하면서도 열매가 없는가? 왜 어떤 기독교인들은 마지막에 교회를 그만 두는가?
3. 사람은 선행 없이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선행이 필요한가?
4. 이 과의 주제는 현대의 장례식에 관하여 무엇을 암시하는가?
(힌트 : 현대 사상에 따르면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