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A.D. 1563) 제 33주일
제 88문 : 참다운 회개 또는 회심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답 : 두 가지인데, 하나는 옛사람이 죽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새 사람으로 사는 일입니다1).
제 89문 :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답 : 우리의 죄를 마음 깊이 슬퍼하고 그것을 더욱 더 미워하고 피하는 일입니다2).
제 90문 : 새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뻐하고3)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선을 즐거이 행하는 것입니다4).
제 91문 :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답 : 우리 자신의 의견이나 사람의 관습에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5)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6),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7),
참된 믿음으로만 행하는 일이 선입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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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서 6:1-11; 고린도후서 5:17; 에베소서 4:22-24; 골로새서 3:5-10
2) 시편 51:3,4,17; 요엘서 2:12,13; 로마서 8:12,13; 고린도후서 7:10
3) 시편 51:8,12; 이사야 57:15; 로마서 5:1; 14:17
4) 로마서 6:10,11; 갈라디아서 2:20
5) 신명기 12:32; 이사야 29:13; 에스겔 20:18,19; 마태복음 15:7-9
6) 레위기 18:4; 사무엘상 15:22; 에베소서 2:10
7) 고린도전서 10:31
8) 요한복음 15:5; 히브리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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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문에서는 선행의 원천과 방법과 목표에 대하여서 가르칩니다. 선행의 원천은 믿음이고, 그 방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는 것이며, 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 세상에서 선행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구제하는 것과 같은 몇 가지로 한정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한정된 몇 가지 일을 드러나게 행하는 것이 선행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행위를 싫어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리새인의 구제는 진정한 선행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모든 것이 바로 선행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선행을 한 좋은 예가 한나입니다. 한나는 가난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사사기의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께 자녀를 구해서 얻었고 언약의 자녀를 얻은 다음에는 하나님께 드려서 사사기의 혼란을 정리하는 아들로 키웠습니다. 한나는 눈에 띄는 어떤 봉사활동을 한 것은 없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믿음으로 구하고 자녀를 양육하였기 때문에 그분은 굉장한 선행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인 사무엘 한 사람을 키운 것은 가난한 사람 여러 명을 물질적으로 돕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선행이었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면서 어떤 일을 한다면 그것은 선행이 아니라 악행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영광을 추구하면서 자기들 나름대로 선행을 하려했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가장 큰 악행을 하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보전한다 하면서, 사람이 되시어 구원주로 오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들의 영광을 위하여서 어떤 ‘착한 일’들을 하려다가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가장 큰 ‘악행’을 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선행과 악행을 가르는 기준은 사람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러한 데에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을 때에도 다른 사람을 의식합니다. 나쁜 일을 하고 싶지만 다른 사람의 눈 때문에 못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익명성이 보장되면 사람들은 죄를 더 많이 짓습니다. 어두운 시간과 장소를 선호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회개를 하는 사람은 마음에서부터 죄를 슬퍼하고 미워합니다. 남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행동하고 속으로 여전히 죄를 품고 있으면 이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는 사람은 ‘내가 마음에 죄를 품기만 하여도 하나님을 진노케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죄에 대해서도 영원히 벌을 내리신다’ 하는 사실을 늘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있는 죄도 미워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죄를 지었으면 그 사실을 슬퍼하고, 죄 지은 나 자신을 미워하고, 죄를 피하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할 뿐 아니라 피한다고 하였는데, 피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행동입니다. 마음으로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행동으로 죄악의 자리를 피합니다. 유혹이 올 때에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하면서 그 언저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행동으로도 조심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에 대하여서 슬퍼하기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겠습니까? 슬퍼하는 마음은 가득하지만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회개를 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가룟 유다는 죄에 대하여 마음으로 슬퍼했지만 복음의 말씀을 믿고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슬픔은 회개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아합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왕상 21-22장). 그는 마음이 여리고 부인에게 꽉 잡혀 살면서 탐욕을 좇아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다 엘리야가 찾아가서 그의 죄를 지적하니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자기가 죄 지은 것에 대하여 슬퍼하여서 걸음걸이도 천천히 걸었지만 그는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다 믿고 새사람으로 사는 데까지는 나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마음으로 뉘우치거나 후회하는 것을 진정한 회개라고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서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