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A.D. 1563) 제 24주일
제 62문 : 왜 선행을 통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와질 수 없으며, 왜 선행은 의로와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답 :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그것은 불완전하며 여전히 죄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제 63문 : 하나님께서는 선행에 대하여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보상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당신은 그토록 선행을 무시합니까?
답 : 그 보상은 노력의 댓가가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제 64문 :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러한 교훈으로 인해 선행에 관하여 무관심해지고 사악해지지 않겠습니까?
답 : 아닙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행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면 사람들이 선행에 대하여 무관심해지고 더 악하여지지 않겠습니까?’ 수긍하기는커녕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은 위험한 교훈이 아닙니까?’ 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이미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롬 5:20) 하고 바울 사도가 가르치자, 유대주의자들은 ‘그러면 은혜를 많이 받으려면 죄를 많이 지으라는 말이냐?’ 하고서 비아냥거렸습니다. 로마서 6장에서 다루는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은혜의 복음을 비난한 것처럼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했으니까 은혜를 많이 받으려면 계속하여서 죄를 더 지어라.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지 않겠느냐?’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것을 가르치면 오히려 사람들은 그러한 반론을 폅니다. 거기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너희가 알지 못하느뇨?’(롬 6:3) 하면서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느뇨?’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6장의 중요한 주제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 때문에 신자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있을 수 없습니다.
64문에서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대답합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 배경에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어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습니다. 붙어 있기만 하면 저절로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감사의 열매’라는 것은 ‘선행’입니다. 착한 일은 반드시 열매로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 가지는 열매를 맺은 다음에 ‘내가 내 힘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고 이야기하는 법도 없을 것입니다. 열매를 맺은 포도나무 가지는 반대로 말할 것입니다. ‘포도나무인 주님께서 나에게 생명력을 주시고 양분을 주셔서 내가 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열매는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고 나는 가지일 뿐입니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62문에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서 질문합니다. 사람의 선행이 ‘의’가 될 수 없는가, 혹은 ‘의의 한 부분’이라도 될 수 없는가를 묻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선행을 해서 내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도덕적이고 능력이 있고 여러 가지 것들을 갖춘 사람은 ‘나는 남에게 해를 끼친 적이 한번도 없으니까 나를 믿어라. 나는 약속하면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고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니까 나를 믿어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한계를 모르는 사람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대담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한 걸음 살짝 물러서서 말합니다. ‘부분적으로 하자. 반반으로 하든지 6:4로 하든지 7:3으로 하든지 하자.’ 어떤 사람은 ‘나는 죄를 많이 지었으니까 예수님께서 90% 하시고 나는 10%만 하고, 9:1로 나누자’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 되니까 나도 착한 일을 조금이라도 보태야겠다. 우리가 누구를 만나러 갈 때에 깨끗이 씻고 좋은 옷을 입고 가는 것처럼 예수 믿으러 나갈 때에도 착한 일로 이렇게 단장하고 나가는 것이 좋겠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선행을 의지하겠다는 사람이나 일부라도 보태겠다는 사람이나 근본적으로는 똑같습니다. 자기를 의지한다는 점에서 같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똑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나를 믿는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는 완전하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11주일에서 배운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구주이든지 구주가 아니든지 하는 것이지 ‘절반의 구주’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행을 조금이라도 보태야겠다고 주장하면, 그는 예수님께서 완전한 구주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보태겠다고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의 힘으로 살겠다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문자 그대로 오십보백보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사실을 엄격히 가르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