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 제3장 수난 당하는 로마 카톨릭 - 3
4. 병인 박해와 블란서(1866)
이때 우리나라는 동학 난으로 많은 시련을 격을때 동북쪽(두만강) 강변에 러시아가 자꾸 통상하자고 압력을 가했다. 당시 대원근의 측근이 카톨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한성에 베르노 주교가 있었는데 로마 교황청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대원군이 카톨릭에 관대한 생각이 있음과 대원군의 부인은 천주교에 상당한 지식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인은 아들 왕자가 황제에 등극할때 미사 드려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또 왕자의 유모는 영세까지 받은 여자였다 한다.
베르노 주교는 한성에서 열심히 전도한 결과 1865년에는 12명의 선교사와 평신도 2만 3천으로 늘었다. 당시 상황이 이래서 김기호, 홍범주 등이 의논해서 조, 영, 블 의 3개국이 동맹하여 방하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민비(대원군의 며느리) 는 비밀리에 베르노 주교에게 블과 교섭해서 외세에서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남종삼(조선의 독실한 카톨릭 지도자)을 대원군이 접촉하는 등 카톨릭과 많은 교제가 있었다. 그런데 희 소식은 오지않고 베르노 주교는 카톨릭은 정치적 개입을 원치않고 방하 책이라는 자체도 부족하다 하여 묵살 하였다. 여기에 자존심이 상한 대원군이 옛 감정이 살아나고 척외사상과 서학금지 상소문이 빗발쳤다. 또 당시 우리가 존중하는 청도 천주교 배척 분위기 여서 더욱 그럼.
그래서 새남터에서 7명의 선교사와 베르노 주교가 죽는다. 서문에서는 조선의 신도들이 많이 죽음. 한국 통사에는 교도 12만명이 죽었다고 기록되으나 다른 자료 종합결과 8천명 정도라함.(3년 동안)
이것으로 인해 블란서 군대를 우리에게 보내 전쟁하도록 하는 원인이 된다. 니델이라는 선교사가 포교들을 피해 충청도 해안으로 빠져나가 2명의 신부는 거기남겨 두고 니델과 조선교도들은 아산에서 어선을 빌려타고 중국 산동 성의 지프라는 곳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 도착한 조선 교도들은 커다란 블란서 군함을 보고 이것으로 조선을 위협하여 천주교를 널리 펼치자고 말했다.
이 조선인 11명중 4명은 중국 3대 도시중 하나인 천진의 블란서 공관에 찾아가 공사인 블란서 제독(로쓰)를 만나서 한국 박해를 보고했다. 이에 분개한 블의은 청국 총리에게 보고하고 니델을 통역삼아 군함을 몰고 강화도에 침공했다.(병인양요) 이것을 계기로 전국에 조서를 내려 어린아이까지 죽임.
* 병인박해와 미국
1866년 7월 평양 대동강에 국적이 미국인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 대동강에 들어왔다.(군함이 아니라 상선) - 여기에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타고 있었다. (런던 선교회 소속 선교사)
한강인줄 알고 대동강에서 있다 물이 빠져 남아있다 평양 관군괴 제너럴 셔먼호가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평양 시민이 모두 합류하여 상선을 불태워 모두 죽였다. 이 일이 있은후 1871년에 북경에 주지하던 미국 공사 F 로 라는 사람이 청국의 총리 아문을 통해 조선 정부에게 셔먼호 사건을 묻게 된다.
- 조선정부는 조선은 외국 상선이라 해서 다 적대한 것은 아니다. 1855년, 1865년에도 미국 함정이 황해도, 평안 연안에 표류했을때 도와주고 헤어질때 술까지 했을 정도다. 따라서 우린 의심 받을것이 없다. 단지 우리 허락없이 통상 하려고해서 불가피 했다고 밝혔다.
- 미국 극동 함대 소장 로져스는 군함 4척을 이끌고(1871) 강화도 해역을 통해 광성진 까지와 싸움 벌어졌다.(한성 수비대와) 이것으로 외교 문제 발생하자 대원군은 일본에게 쇄국을 다시 재천명 했다. why? 당시 조선은 외교를 몰랐으며 일본 외에는 설명할 곳이 없었고 일본이 다른나라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헤밀턴 피시(미국 국무 장과)는 일본 정부를 통해 조선의 쇄국 정책을 듣고 이제부터 미국과 조선관계는 일본이 좀 처리해 달라고 부탁.
- 1905년의 을사조약, 1910년의 한일합방의 배경이 됨.-
cf.여기에 대해 로빈슨이라는 유명한 역사학자는 고대 로마 기독교인들이 당한 고난보다 한국의 4대박해때 고난이 더컸다고 말했다. 스테판 나일 박사는 책에서 조선 카톨릭 역사는 가장 로멘틱하고 믿지 못할정도의 수난시대라고 말함.
* 조선 천주교의 신앙 형태
조선 천주교는 철저히 수난과 박해로 얼룩져 있고 4대 박해를 거쳐오는 동안 피맺힌 헌신과 형극을 거치면서 신앙형태가 생겼다.
(1) 이들 교회는 수난을 통해 오면서 상류에서 하류층으로 신앙의 계층적 구조로 변모 되었다.
(2) 중류적인 감각에 호소하고 민족 주체의식이나 고유의 민족의식에 접촉함으로서 조선적 기독교에 언문(한글)을 중시하게 ㄷ다.(천주교 서적이 많이 한글로 되있다.)
(3) 1850년대 와서 천주교가 하류층으로 파고들어 격정적이고 종말적인 위기 의식으로 변모됨. 그래서 마침내 저들은 박해로 인해 종교의 내면화 지향 된다.
(4) 1919. 3. 1일에 개신교 교도들은 많이 참여했으나(33인중 16명) 천주교 교인은 전혀잠잠.(박해에 그동안 질림)